< 김쌤의 500자 이야기 > 먼 곳
< 김쌤의 500자 이야기 > 먼 곳
노인 요양병원 3층 복도에 노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스무 명도 넘는 수였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휠체어에 누워서, 복도 의자에 앉아 허리를 구부린 채, 그리고 엉거주춤 서서,
아무런 표정도 없이 복도 끝 병실 문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또 먼 곳으로 떠나신 것입니다.
하얀 천에 덮인 시신(屍身)은 침대 벨트에 묶인 채 노인들 앞을 지나 엘리베이터에 실려졌습니다.
흐느낌도,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요양원 직원들의 최소한의 움직임만 엿보였을 뿐,
노인들은 모두 금방 닫힌 엘리베이터 문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현관에는 장례식장 차량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가족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필시 영감님은 먼저 떠나셨겠지요.
그럼 자식도 없었을까요?
어쩌면 청상과부로 험한 세상 가시밭길을 슬피 울며 혼자 살아온 지 모릅니다.
톨스토이 『부활』의 ‘카츄샤’ 처럼 고운 나이에 순결을 유린당하고 떠돌이로 살아온 한 맺힌 여인일지도,
토마스 하디 『테스』에 나오는 주인공 ‘테스’일지도,
박경리 『토지』의 최참판 무남독녀 '서희'의 일생이나,
최명희 『혼불』의 ‘청암 부인’ 같은 여인인지도 모릅니다.
요양원을 빠져나가는 장례식장 차량을 3층 창가에서 지켜보면서
생각나는 조사(弔詞) 몇 줄 읊조렸습니다.
‘아짐, 부디부디 모든 일 다 잊어버리시고 평안히 가십시다.
뒤 돌아보지 말고 가십시다.
한 많은 한 세상 바늘 같은 몸에다가 황소 같은 짐을 지고,
일어나다 쓰러지고…….
이 서러운 세상 못 잊을 게 무엇이라고 가던 발걸음을 돌리시겄소.
훨훨 벗어버리고 입은 옷도 무거운 육신도 다아 벗어버리고 부디 좋은 데로 가십시다.’
- ( 최명희, 『혼불』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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