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은 멀리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면면히 그 맥을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흔히들 우리 문중을 가르켜 명문대가의 후예들이라고 일컫는다. 가통을 살펴보면 신라 경순왕 둘째 아드님이신 德摯 할아버지를 시조로 하고 그후 제2세부터 제13세까지는 실전으로 되어 있고 제14세 環 할아버지부터가 우리족보에 기록되어 내려오고 있으나 현재의 울산김씨는 제17세 穩 할아버지의 세분 아드님 즉 장파 파조이신 達根, 중파 파조이신 達源, 계파 파조이신 達枝 할아버지들 세분을 민씨 할머니께서 거느리시고 장성 낙향하시어 터전을 잡게된 후부터 그 세분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퍼져서 오늘날 큰집을 長派, 둘째집을 中派, 셋째집을季派라 하면서 장성을 중심으로 그 인근 시 군에 분포되어 살아 왔으나 현재에 있어서는 그 거주분 포가 거의 전국에 걸쳐 있는 실정이다. 자손들이 번창하여 일가 친척의 수가 늘어나고 또 거주하는 직역이 광역 해짐에 따라 집안에 문사를 통괄하는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든지 언제 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가문에는 문중의 어른 격인 문중제도와 문중일을 총괄집하는 도유사제도가 마련되어 문중일을 처리해오고 있었다. 그간의 내력을 보면 문장이나 도유사는 한번 선출되면 거의 종신토록 그직에 머물렀다.

 

또한 그 선출방법도 오늘날처럼 어떤 회의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결원이 생기면 그 익년 음력 정월14일 즉 문정공 하서 할아버지의 제사전일 중평리 제사에 참석한 종친들 끼리 상의하여 적임자를 선출하고 그 해 음 9월 그믐날 즉 민씨 할머니 시제 전일에 시제에 참석한 종친들에게 누가 문장 혹은 도유사에 선출되었다고 통보하면 그대로 인정되게 되는 관습이 오랜동안 계속되 내려왔다.

 

그러든 것이 근래에 와서 제사에 참석치는 못하는 동친들 중에서도 문사에 관심을 갖기에 이르고 문중 기관을 선출하는데 참여하기를 원하는 종친들이 많아짐에 따라그 선출 방법등에 대해서도 보다 많은 종친들이 참여하여 선출하는 것을 바라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가운데 지난 1982년 말에 그때까지의 도유사 직책을 맡아 오시던 黃中 어른이 작고하시게 되었는데 문중에서는 도유사의 위치가 중요하니 만큼 오래 공석으로 둘수가 없다하여 그분의 장례절차가 진행되는 중에 현재 광주에 거주하시는 相一종친을 도유사 직무 대행으로 선출하고 그 익년 즉

 

1983년 음력 정월 14일 저녁에 종래의 관례대로 중평 문정공 할아버지의 제사 전일에 그곳에 모인 몇몇 종친들이 상일 종친을 정식 도유사로 선출하게 되었고 또한 관례에 따라 동년 음력9월 그믐날 밤에 민씨 할머니 세제에 참석한 종친들에게 그 사실을 통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먼저도 말 한바와 같이 문중 기관 선출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종친들이 도유사 선출과정과 방법에 의의를 제게하고 추인을 거부하는 동시 지금까지는 문중에 문규가 없어 그랬으니 상일종친의 도유사임기를 향후 1년으로 시한부 승인함과 동시 상일도유사로 하여금 문중 삼파에셔 선출 파견되는 대표들과 협의하여 문중 문규를 초안하여 익년 즉 1984년 제사 전일까지 제출하게 하고 제사 전일에 그문규를 심의 통과시켜서 그 문규에 의거하여 문중 도유사를 선출하자는 방향으로 결의하고 회의를 산회하였었다.

 

그랬으나 그 후 그곳에서 위촉된 삼파의 문규 초안 위원회는 소집된바가 없고 다만 중파에서 울산김씨 문정공파 문규가 초안되어 1984년 2월 26일 즉 음력 정월 14일 밤 문정공 할아버지 제사전일에 그곳에 참석했던 종친들에 의해서 통과를 보아 울산김씨 문정공파 문규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한 내용을 후에 알게된 뜻 있는 종친들은 파를 가릴 것 없이 종중을 단합시키는 통일된 문규 기초를 위임하였지 사파문규기초를 위임하였느냐고 여러 가지 불만성이 일게되어 이 일을 그대로 두고 음력 10월 시제 때까지 가면 또 한차례 문중에 불란이 날 것을 우려하게 되어 몇몇 뜻있는 종친들이 모여서 보다 현대 감각에 맞는 문사를 집행 할 수 있는 대종회의 조직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아 종친들의 개별 접촉을 통하여 대종회 창립준비 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84년 7월 29일 서울 용산구 소재 크라운 관광 호텔에 鍾百, 泳仲, 泰中, 中, 鎔普, 得洙, 近洙, 永, 連洙, 達洙, 鳳柱, 相俊, 相郁, 炳, 鎭云, 英, 煐奎, 炳河, 炳昱, 冕圭 종친등 20명이 모여서 문중의 현대화를 위한 대종회 창립을 논의하게 되었고 당시 회의에서는 원칙적인 문제는 전원 찬성하나 문중의 기존 기관이 있으므로 그분들 동의를 얻어서 진행하는 것이 정도라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당일 참석자 회의를 가칭울산김씨 대종회 창립준비위원회라 칭하고 발기 및 결성총회 개최 방법은 현 종중 공식 기관인 도유사와 3파 유사의 승인을 전제로 동년 8월중에 발기 및 창립총회를 개최키로 하며 발기준비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에 영중, 위원에 태중, 근수, 달수, 상욱, 영규, 면규, 병하, 병욱종친을 위촉하여 대종회 발기준비에 따르는 사무일체를 위임하고 산회하였었다.

 

그 후 소위원회에서는 1984년 8월 초순부터 활동을 개시하여 도유사겸 중파 유사 상일, 장파 유사 요덕, 계파 유사 록영종친님들에게 그간의 경과와 문중 여론을 개별 보고하여 대종회 결성에 대한 승인을 받음과 동시 위 세분의 명의로 1984년 7월 29일 서울 회의에 참석했던 20종친을 대종회 발기 및 결성 준비위원으로 그 회의에서 위촉된 준비 소위원회 위원9명을 준비 소위원회 위원으로 서면 위촉을 받았을 뿐 아니라 대종회 경성시까지 필요한 모든 업무를 도유사의 명의로 수행할 것을 업무지시로 받아 준비작업을 진행함으로서 명실 상부하게 전년도 명정리 시제때 문중 회의에서 도유사에 위임했던 일들이 도유사의 책임하에 이루어지는 형식으로 업무를 진행하였었다. 그 후 준비 소위원회는 전후 9회에 걸친 회합을 갖고 발기 취지문 안, 대종회 정관 안, 등을 기초하는 한편 일부위원을 지방에 출장케 하여 종친들의 개별 서명을 받는 한편 여러 종친들의 의견을 수렴하는데도 힘을 써서 멀리 경남 진주에 거주하는 종친들에게까지 통고를 하여 당시 각 지역별로 화수회를 조직운영하고 있는 지역은 총 망라하여 발기 취지에 찬동을 받았으며 대회 준비를 위한 경비조달, 원로 종친들에 대한 취지 설명등을 거쳐서 1984년 8월 26일 11시 서울 용산 크라운 관광호텔 대연회장에서 전국 14개 지역 및 41개 사파문중 대표 123명이 참석하여 역사적인 울산김씨 대종회 결성 발기 및 창립총회를 갖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총회에서는 발기 취지문과 대종회 정관을 통과시키고 정관에 의한 임원을 선출했고, 앞날의 문중단합과 발전을 기약하는 여러회원들의 의견이 속출하였으며 유사이래 처음으로 문사에 대해서 민주적인 방법으로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는 광장이 되었었다. 당일 회의에서는 정관에 경과규정이 없으므로 회장은 종전의 도유사가 대칭되는 것으로 해석하여 전년도 명정리 문중회의에서 도유사의 임기가 1984년 음력 9월 그믐까지로 되어 있으므로 오랜 전통을 살린다는 뜻에서 돌아오는 제삿날에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새회장을 선출키로 하고 새로운 직책인 7인의 부회장과 2인의 감사를 선출하고 기타 운영위원회에서 제청하여 총회에서 추대하게된 명예회장 및 고문은 후일 운영위원회에서 제청하여 추대키로 결의하고 산회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1984년 음력 9월 그믐날 오후 2시부터 명정리 민씨 할머니 제각앞. 광장에서 제1회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제2대 대종회 회장의 선출을 하였는바 현 동아일보 명예회장이신 상만종친을 참석 대의원 109명이 만장일치로 선출하였으나 상만회장은 사업상 건강상의 이유로 아직까지 취임승낙을 하지않고 있는 실정이다. 상만회장이 취임을 상ㅇ하고 있는데에는 그 표면적 이유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있다고들 하나 그것들은 노할 근거가 없는 것이고 다만 우리 대종회로서는 그 분이 하루빨리 취임을 승낙해 주시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러면 대종회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 의문이 있을 것 같아서 부언해 두고자 한다. 현대 감각에 맞는 정관을 갖고 있는 대종회 이기에 설사 회장이 유고라도 그 운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유고시를 대비한 회무의 대행자가 정관에 의해서 정해져 있기 때문에 현재는 수석부회장 책임하에 운영위원회 중심으로 각종 회무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1985년도 제2차 정기총회에서도 회장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끈기있게 상만회장의 취임을 권유하고 취임을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다.

 

그 외의 임원진은 다음과 같아.

 

부회장

金 鍾 百, 金 泳 仲, 金 杉 洙, 金 鳳 柱, 金 炳 , 金 正 敎, 金 東 準

감   사

金    葉, 金 冕 圭

서울화수회장

金 冠 洙

부산화수회장

金 炳 龍

광주화수회장

金 商 洙

대전화수회장

金 洛 柱

전주화수회장

金 載 正

이리화수회장

金 炳

장성화수회장

金 鎔 普

목포화수회장

金 相 琦

광양화수회장

金 在 玉

고창화수회장

金 炳 鐸

정읍화수회장

金 相 雨

김제화수회장

金 相 俊

남원화수회장

金    

부안화수회장

金 炳 采

진주화수회장

金 謹 柱

운영위원

 

泰 中. 昌 洙. 達 洙. 哲 柱, 鎭 云. 炳 河. 煐 奎

2명의 운영위원이 결원임

 

끝으로 우리 대종회 창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고 지도해주신 전 도유사 상일종친과 장파 유사 요덕, 계파 유사였던 록영종친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대종회 운영에 총담하시여 오늘날까지 지도편달해주신 문중 여러 어른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가사를 드리는 동시 앞으로 대종회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실 수 있든 고 백우 록영종친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빈다.

 

이상 대종회가 탄생되기까지의 경과를 마치면서 대종회 창립준비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해 주신 분들을 기록하여 감사의 뜻을 표한다.

 

준비 소위원회 활동지원금으로 泳仲, 炳河, 相俊종친이 각 10萬원씩, 炳. 鳳柱 .鎔普. 鎭云종친이 각 5萬원씩, 결성총회개최 지원금으로 相一, 泳仲, 炳, 葉 종친이 각100만원을, 晶中종친이 50萬원을 협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