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쌤의 800자 이야기 > 대한 청년 윤봉길은 어디 있는가?
< 김쌤의 800자 이야기 > 대한 청년 윤봉길은 어디 있는가?
『백범일지(白凡逸志』하편을 보면, 거사 4일 전
윤봉길(尹奉吉,1908.6.21∼1932.12.19)은 태극기와 민족 앞에서 선서합니다.
김구는 윤봉길에게 돈을 내밀며, ‘마지막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하라.’고 합니다.
『백범일지』 중 가장 비장하고, 슬픈 장면입니다.
1932년 4월 29일 거사 당일,
김구와 조반상을 마주한 윤봉길은 쓰고 남은 돈과 자신의 시계를 내놓고,
도시락(벤또)과 물통에 넣은 사제폭탄을 가슴에 안고 차에 오릅니다.
김구는 윤봉길에게 마지막 하직인사를 합니다.
“우리 죽어 다시 만나세!”
상하이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일왕(日王)의 생일(천장절·天長節) 행사장에 접근한 윤봉길은
식이 시작되기 무섭게 중국 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비롯,
일본 요직인사들에게 폭탄 두 개를 던지며 목이 터져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칩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이 법정에 섰을 때,
일본 법관이 윤봉길에게 물었습니다.
“현장을 답사했는가?”
“그렇다.”
“무엇을 보았는가?”
“행사장 운동장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잔디는 내 발에 밟혔지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밟혔던 잔디는 다시 일어섰다.
너희는 지금 우리를 짓밟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는 독립을 하게 될 것이다.”
22살의 청년, 대한의 의혈남아(義血男兒) 윤봉길의 우렁차고 당당한 목소리였습니다.
멀미약을 눈에 붙여 동공을 확대하고, 멀쩡한 생니(齒)를 뽑아내고,
정신 질환자로 병원 서류를 조작하여 병역을 기피하는 젊은이들,
이 핑계 저 핑계로 병역을 기피하고 뻔뻔스럽게 고위직을 꿰차고 앉아 있는 정치관료들,
대한 청년 윤봉길은 어디 있나요?
백범 선생님은 무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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