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글
작성자 김정
작성일 2014-07-15 (화)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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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쌤의 800자 이야기 > 얼굴을 잃어버린 세상
< 김쌤의 800자 이야기 > 얼굴을 잃어버린 세상






산속에 사는 한 남자가 장을 보러 가게 되었습니다.

장에 가기 전날 밤, 부인이 빗을 하나 사다 달라고 했습니다.

잊기 잘하는 남편이기에 밤하늘에 뜬 반달을 보며 이렇게 말했지요.

“여보, 빗이 생각나지 않으면 밤하늘 달을 보세요. 달이 빗 모양처럼 생겼잖아요?”

 

다음날 남자는 내다 팔 짐을 잔뜩 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여러 날을 걸려 장에 도착한 남자는, 며칠간 갖고 온 물건을 모두 팔고,  

밖에 나온 김에 구경을 하겠다며 실컷 돌아다녔습니다.

며칠 후, 남편이 집에 가야겠다 생각하자 부인의 부탁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영 떠오르질 않는 겁니다.

하도 답답하여 밖에 나온 남자는 휘영청 둥근 달을 보게 됩니다.

순간 남편은 달처럼 생긴 물건을 사다 달라던 부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다음날 남자는 달 모양으로 된 물건을 찾다가 둥근 거울을 하나 샀지요.

그사이 달이 보름달로 커졌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생전 보지도 못한 물건을 받아든 부인은, 깜짝 놀라 시어머니께 달려갔지요.

그리고 남편이 장에 갔다 오더니 웬 젊은 여자를 데려왔다며 이걸 어쩌면 좋으냐고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그럴 리가 없다면서 거울을 받아들고 보더니만,

한참 뒤 혀를 차며 말합니다.

“원 애두, 기왕 데려오려면 젊은 여자를 데려오지 웬 늙은이를 데려왔담!"

 

부인은 부인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도 자신인 줄 모릅니다.

자기를 보면서 타인이라 생각하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울 앞에 서본 적이 없는, 아니 거울이 무엇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누구의 모습인지 모르는 사람들.

거울은 내 앞에 있지만 거울에 비치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세상,

자신을 아예 잊고 사는 세상,

얼굴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거울이 없는 세상에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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