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자 대종회 부회장 김 오 준
작성일 2017-02-28 (화) 11:51
분 류 특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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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단 10분이라도 돌아봐야 할, 국가기념일 3.1운동의 발자취
  3.1절에 단 10분이라도 돌아봐야 할, 국가기념일 3.1운동의 발자취.!!

내일 3.1절은 1945년 광복이후로는 벌써 72회째 맞는 국가기념일 입니다.

회한(悔恨)의 일제(日帝) 36년 그 악몽의 역사(歷史)를 망각(妄覺)한 체 해마다 혹 무의식속에 3.1절을 맞게 된다면 역사의 퇴보(退步)가 뻔할 것 같아 이를 반성(反省)하는 의미로 3.1절에 단 10분이라도 온 국민이 이 역사를 되돌아 짚어보자는 뜻 깊은 순간을 마련코자 잠시 역사를 회고(回顧)해 보고자 합니다.  

무릇 역사의 한 단면(斷面)이지만 얼마 전 2016년12월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일본 아베수상이 만나 일본은 러시아의 땅 수만 분지일의 작은 영토 4개 쿠릴열도 섬(북방영토 北方領土) 반환(返還)과 평화조약 체결 문제에 진전(進展)을 바랐지만 러시아는 과거 전쟁당사국(戰爭當事國) 이었기에 패전역사(敗戰歷史)를 곰씹으며 반환거절(返還拒絶)한 일본(日本)에서의 회담결과, 우리는 그 역사(歷史) 그늘을 충분히 인식케 되었다.

우리 한반도도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 이래 일제잔혹 탄압치하(彈壓治下)에 접어들면서 조국 한반도는 그야말로 국권(國權), 주권(主權), 민권(民權),이 모두사라진 체 암흑천지(暗黑天地)가 되었으나 1919년 3.1운동(三一運動)의 발발로 이 땅위에 황국신민(皇國臣民)이 아닌 한민족존재(韓民族存在)를 만천하(滿天下)에 드러내 알리는 기념비적 민족운동(民族運動)을 전개(展開)함으로써 잠들어 있던 아세아(亞細亞)도 일깨웠고, 또 20세기 세계사적사건(世界史的事件)으로 비화(飛火)케 하는 동인(動因)을 우리 민족스스로가 비폭력 하에 쟁취했던 실로 거룩한 민족독립운동(民族獨立運動, nationalism)의 발자취, 그 기념일(記念日)이 바로 내일 맞는 광복(光復) 3.1절(三一節), 그 98회째의 기념일이다.

만일에 일제치하 때 우리민족이 3.1운동을 제때에 일으키지 못했더라면 어찌 됐을까.? 만일 그러 하였더라면, 일제 36년은 보다 더 오래토록 연장될 수도 있었고 우리가 또 까맣게 몰랐던 1910년 한일합방 5년 앞인 1905년경부터 벌써 이미 미, 일(美,日)은 가쓰라 테프트 밀약으로 대한제국과 필리핀을 자기들 물건처럼 나눠 갖기로 흥정했다던 제국주의(帝國主義) 열강(列强)속 한반도 현실, 그 운명적 상황을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았을 때 이 한민족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 됐을지도 한숨 내쉬어지는 그 때의 그 시대상황을 오늘 다시, 예단해  보면서

서기 1919년 3,1운동과 같은 해 4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을 촉발케 했던 두 사건의 연결고리가 된 재일 동경조선유학생회의 2.8독립선언을 회고할 때에 세계학생운동의 최고봉이기도 하지만, 인류역사상 유일무이하게도 적국(敵國)의 심장부에서 일으킨 식민지(植民地) 독립운동(獨立運動)으로 기록되며 그 담대(膽大)함에 당시 세계 언론이 주목(注目)하였으며.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일(1918년11월)과 불과 3-4개월 그 사이, 그 짧은 찰나에, 즉 1919년 3월1일에, 드디어 칠흑어둠을 뚫고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역사적 비폭력 3.1만세함성(三一萬歲喊聲)이 한반도 전국을 뒤흔들어 일제간담(日帝肝膽)을 서늘케 한 역사적 쾌거(快擧)는 한민족자존(韓民族自尊)을 아세아(亞細亞)를 비롯한 세계만방(世界萬放)에 드러내 높이는 빅-뉴스로 타전(打電)되었고 동시 한반도는 청천개벽(晴天開闢)의   계기(契機), 그 단초가 열리게 되었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결과(世界大戰結果)로서 1919년 1월 18일에는 전승(戰勝) 27개국이 프랑스 파리에 모여 “파리 강화회의(講和會議)”를 개최할 때 토마스 윌슨 미대통령이 14개조 평화원칙(平和原則)과 1차대전 후 처리원칙 중 각 민족운영은 그 민족스스로 결정케 하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가 알려졌고 동시 쏘련 지도자 불라디 미르 레닌도 제국주의반대 일환, “민족자결주장”등 세계적(世界的) 민족주의운동(民族主義運動)에  커다란 호응(呼應)이 지펴지게 되었으며 이를 따라 조선독립운동가(朝鮮獨立運動家)들 사이 에서도 희망(希望)찬 분위기(雰圍氣)가 일어났으며, 이즈음에 한편, 1919년 3월 노은 김규식(金奎植)은 파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파리위원회 한국대표단의 사무실을 내고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전개하였다 하고 4월에는 파리강화회의 조르주 클레망소 의장에게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서한(書翰)을 전달하였으며 유럽신문들도 한국임시정부의 파리위원회 활동기사를 싣기 시작하였다 하고 또 중국에 유학중인 몽양 여운형(呂運亨)은 뒤이은 토마스 윌슨 미대통령의 파리강화회의에 대비하여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이란 단체를 문서상으로 조직했다 하며 파리강화 회의에는 영어 잘한다는 설산 장덕수(張德秀)를 파견 한다는 비전이 제시되어 이 소식은 조선안팎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을 삽시간에 고조(高潮)시킬 충분한 희소식(喜消息)으로 작용(作用)케    되었으나,  

결론적(結論的)으로 볼 때 국내 3.1운동거사(三一運動擧事)와 민족대표33인결성(民族代表33人結成)등, 세부과정(細部過程)은 오히려 서울 종로구계동1번지 중앙학교(현 중앙고등 학교)개교 100주년기념(1908-2008)행사일환으로 제작된 기념CD에 오롯이 수록된 3.1운동 그 비사(秘史)에 기술돼있어 이를 토대로 3.1운동거사 그 저변 면모를 되돌아보게 된다.

중앙학교(中央學校)는 주지(周知)의 사실대로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기에 민족정신(民族精神)을 일깨우는 민족의 요람(要覽), 선봉(先鋒)에 서 있었고 또 이 학교에는 이미 1914년에 와세다대를 졸업한 유학선배들이 있음을 알고서 1919년 1월초에 학교장사택(學校長私宅)에 은밀히 찾아온 일본 동경유학생 송계백 씨가 마침 교주 인촌 김성수(金性洙)와 학교장 송진우(宋鎭禹) 그리고 교사 현상윤(玄相允) 3인을 만나 일본에서의 선언문(宣言文)을 전달하며 4인의 담소이후 이때부터 비로소 3.1 운동의 서막이 열리는 계기(契機)가 이어지게    되었다, 전해진다.

그 이후 중앙학교 숙직실에서는 인촌 김성수, 교장 송진우, 교사 현상윤, 3명 등이 숙식을 같이하며 연속적으로 담소하던 중 어느 날엔가 신문보도로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관련전망 보도가 비춰지자 전쟁이 끝나간다는 소식에 뜨거운 가슴속열정의 울분을     토로 하고, 때로는 냉철한 이성으로 국제정세를 살피며 미국대통령 토마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도 천명된바, 민족의 나아갈 길도 함께 고민했던 때도 있었다 한다.

또 한편으로 앞 각론서 비췄던 한국인들의 파리평화회의 참석계획은 일제의 방해 공작을   받아 결국 계획수행에 실패했다는 전언이 들렸지만 그러나 중앙학교에서 만큼은 거사준비  를 은밀히 한 가운데 차곡차곡 진행하여오고 있었기에 3.1운동의 생명력은 오히려 내부에서 강건해 졌는바  그러던 중 어느 날 또 일본 유학생 송계백 씨가 다시 찾아와 인촌 김성수 등 세 청년에게 근촌 백관수가 전달하라 했다며 일본에서의 2,8 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해 왔으며 이때 인촌 김성수는 일본의 재일동경유학생회 거사를 위한 자금을 전달하였고, 그 길로 인촌은 보성학교장 최 린과 국내최대 종교인 천도교 손병희 선생에게도 각각 자료를 전달하였는바 천도교령은 젊은이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나섰으니 우리가 앉아서 좌시할 수만 없는 일이라며 동참할 뜻을 적극강조 하였고 동시에 육당 최남선을 만나서 이를 알린바 그러잖아도 망서려 왔었는데 독립선언문을 직접 작성해 보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였으며, 2월초 일본에서 2.8독립선언 개시결정일이 전보로 전해오자 때마침 국내거사일정 추진에 청신호가 켜져 박차를 가하게 됐으며,  

이 찰나 일경순찰의 감시도 더욱 심해졌으려니와 일경의 감시를 피하며 마침내 고종(高宗) 국장전일(國葬前日)을 독립선언일(獨立宣言日)로 택해 거사 일을 결정할 때 천도교 손병희(孫秉熙)선생과 기독교계대표 남강 이승훈(李昇薰)씨도 달려왔으며 불교계 한용운(韓龍雲)씨 동참 등, 드디어 33인의 진용결성을 마무리 짓고 3월 1일에 서울 종로구에서 역사적 3,1독립선언문을 낭독할 때, 모처럼 조선민족이 한 마음되어 삼천리(三千里) 방방곡곡(坊坊曲曲) 태극기 휘날리며 부르짖던 만세함성(萬歲喊聲), 그 역사현장의 날이 오늘 맞는 3.1절 제 98회 기념일이다.

지금도 3.1운동 역사 공과를 따질 때에는 1943년 이집트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의 토마스  윌슨 대통령, 영국의 처칠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회담서 대한민국의 자주독립 필요성과 일본의 국제적 침략국으로 회자되게 되었다 평가되었고, 연이은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 이어 1945년7월 포츠담선언을 통하여 일본에 원폭이 투하된 바, 한,일 합방 36년만의 일제항복으로 광복을 맞는 역사적 쾌거에 이르게 되었음이 입증되었고,

만일, 우리민족이 3,1운동의 기회를 잡지 못했더라면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이집트 카이로 회담 등, 미(美).영 (英).중(中). 강대국의 올곧은 국제평화노력의 향방은 혹 어찌 되었을까를 또 한 번 되뇌며,    

우리가 오늘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를 알아야 하는 바, 역사란 오늘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하여 지난날의 역사를 되돌아봐야한다는 중국의 비평문학가 임어당(林語堂)의 되뇜도 떠올리며. 3.1절을 기하여 자랑스러운 우리민족사 3.1운동의 역사기개(歷史氣槪)를 다시 한 번 장황(張皇)하나마 되새겨보면서 3.1운동의 민족웅지(民族雄志)와 그 저력(底力)을 가슴깊이 되새겨 봅니다. 끝.

註 : 1. 미국 윌슨대통령= 토마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
미 제28대대통령, 1918년 민족자결주의(Principle of National Self - determination)‘를 주창하였다. ( 1856~1924 ).
   
2. 러시아 국가원수 = 블라디미르 레닌 ( Vladimir Lenin )
쏘련최초 국가원수, 러시아 11월 혁명(볼셰비키혁명, 구력10월) 의 중심인물로서 러시아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 이자 사상가이다. (1870~1924).

3. 인촌 김성수(金性洙) = 동아일보사와 중앙학교. 고려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특히 3.1운동을 은밀히 본 괘도에 올린 그 혁혁한 공로가 쌓여져 평소 겸양의 미덕이 높기로 명성이 자자한 인촌 이지만 필시, 대한민국수립 후 제 2 대 부통령에 추대돼, 역임케 된바 있거니와 특히 정치,언론, 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 우리의 근대사의 큰 족적을 남긴 인촌 김성수 선생(1891∼1955)은 울산 김씨 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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