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글
작성자 대종회
작성일 2012-05-03 (목)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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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웅 부회장님께서 메일로 보내신 글
 
울산김씨 대종회 홈페이지 운영자 귀하

종사일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우선 홈페이지 개설을 축하하오며 울산김씨내력 난을 보고 12대 失傳에 대한 오해를 불러오지 않을까 염려되어 수정안을 보내오니 검토하시어 수정해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실전에 관한 글을 보내니 참조하십시요.

〔수정안〕蔚山金氏는 신라 경순왕의 제2子인 鶴城府院君(諱 德摯)이 始祖이며 망국의 한을 품고 은둔하였다. 十四世 環(환)은 고려 말 三重大匡에 오르고 鶴城君을 다시 봉하였다.울산김씨 十二代 失傳에 관하여 金 鎭 雄 씀

울산김씨 대동보에 의하면 시조 金德字摯字이하 十二代가 失傳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최근에 와서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잘못된 기록들이 홈페이지에 게재되고 있어 이를 방치할 경우 일파 만파로 와전되어 젊은 층에게 이것들이 마치 정설인양 잘못 인식될 가능성이 있기에 실전에 대하여 설명해 드리고져 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시조께서는 마의태자와 함께 고려에 나라를 바치는 것에 반대하여 입산하여 고려조에 입조치 아니하였다. 그러나 고려 왕건은 신라 경순왕이 천년사직을 백성들의 희생없이 양여한것에 대하여 대단히 고맙게 여기고 극진한 예우를 하였으며 그 자손들에게도 각별한 우대를 하였다. 따라서 시조께서 입산할 때 두고 간 처자들도 마땅히 각별한 대우를 받으며 개성에서 대대로 살아 온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리며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면서 명문거족으로 살아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족보상에 십이대나 조상의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고 없어져 버린 것일까? 혹시 그동안 집안이 몰락하여 벼슬도 하지 못하고 寒微하게 살았기 때문에 실전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족보제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고려후기에 와서 비로소 자기 조상에 대한 기록을 하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현대의 족보처럼 씨족 전체를 망라한 대동보는 없었고 다만 각자 자기 조상만을 간단하게 기록한 家乘정도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 초기에는 거의 그 기록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고려후기부터 기록해 오던 가승들이 세월이 오래 흐름에 따라 그 분량이 점점 많아지고 같은 씨족이 많아짐에 따라 이것을 하나의 책자로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으로 족보를 만든 것은 조선 성종7년(1476) 안동 권씨 成化譜이며 그 다음은 명종20년(1565) 문화 류씨 嘉靖譜이다. 다시 말해서 그 이전에는 모든 가문이 각자 가승만 가지고 있었을 뿐 족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 울산 김씨는 언제 처음 족보를 만들게 되었을까? 순조9년(1809)己巳보의 서문에 의하면 掌令公(휘 壽祖)의 증조부인 藏谷공(휘 泰夏)이 숙종15년(1689)기사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발행하려고 受單을 마치고 판각을 모두 마치고 인쇄에 들어가려 할 무렵 집안의 불상사로 인하여 족보발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316년 전에 처음으로 족보의 수단을 하였다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우리 집안은 조선개국초기 흥려군께서 왕자난 때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더불어 화를 입고 돌아가시니 민씨 할머니가 화를 피하여 삼형제를 거느리고 장성으로 낙남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창졸간에 화를 피하여 길을 떠났으니 가승을 잃어버렸는지 아무튼 가승이 전해지지 않고 다만 민씨 할머니께서 기억하고 있는 가승만을 겨우 기록해 놓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거의 삼백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족보를 처음으로 수단하였으니 그 때 기록된 가승만을 수록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環자 할아버지는 고려말에 삼중대광을 지내셨고 학성군에 다시 봉해질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민씨 할머니께서 기억하고 있었고 또 그 배위는 남양 홍씨로 명문 집안이며 맥동에 세거하고 있던 홍씨 집안으로 민씨 할머니가 정착한 것도 모두 그러한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족보를 만들면서 기록에 있는 것만 수록하고 기록에 없는 것은 수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중기 이후에 족보를 만들면서 다른 씨족들은 자기의 조상이 실전되었다고 하면 집안이 한미하거나 명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인정될까 두려워 하여 기록에 없는 부분을 失傳이라고 하지 않고 조작하여 허위로 기록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족보제도가 없던 고려초로부터 일목요연하게 한 대도 빠짐없이 있는 것이 더 의심할 일이지 실전하였다고 기록한 것이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앞서 말 한대로 우리 집안은 고려시대에도 대대로 명문이었으며 다만 조선조초 피란하면서 그 이전 가승이 없어 졌을 뿐이며 그것이 조금도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족보를 만들면서 조금이라도 근거가 없는 것은 절대로 기록하지 아니 하였고 또 남의 집안의 족보에 비슷한 기록이 있다하여 그것을 우리 족보에 인용하여 우리의 기록인양 기재하지 않았고 다만 羅州 金譜에 의하면 이러 이러한 기록이 있다고 참고로 附記해 놓았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족보는 興麗君의 자손만 기록되어 있는데 흥려군 윗대에서 분파된 울김 자손들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로되 그 윗대 자손들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으니 근거가 없는 것을 허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기사보를 간행할 당시 이것을 대전제로 명시해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근거가 없는 것은 절대로 기록치 않는 것이 옛날 우리 조상들의 자세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나주김씨 족보에 우리의 실전된 조상의 기록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이 우리 조상이라고 까지 주장하는 일이 있는데 그 나주 김보의 기록이 우리의 조상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의 조상이라는 근거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나주 김씨집안에서는 고려초기부터 가승을 만들어 완벽하게 기록해 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며 앞서 말한 대로 고려후기까지 가승조차 없었는데도 그 집안만 유달리 어떻게 기록을 남길 수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일부 집안처럼 조선중기이후 족보를 만들면서 실전된 부분을 조작하여 기록하였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역사라고 어떻게 받아 드릴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조상들이 족보를 만들면서 그런 기록을 보고서도 우리의 역사로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실전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역사의 기록이란 흔히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록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고 근거가 명확한 역사만을 기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춘추필법으로 당당하게 失傳이라고 표현하였으니 실전이 우리에게 결코 부끄러운 역사가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종친 여러분! 옛날 우리 조상들은 지금 우리에 비하여 조상숭배의 정신이 훨신 투철하였고 학식 또한 해박하여 우리가 상상할 바가 아니었읍니다. 이러한 분들이 오죽 깊이 검토하고 결정하였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라며 이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의 잡음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두서 없는 글을 쓰게 되었음을 이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필자소개; 서울대 졸업. 漢學者. 漢詩作家.
文正公 河西先生 大宗中 副都有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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