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경주김씨 백촌공파는 아직도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가?
같은 시대의 조선시대도 (유학에 근간한 사회) 왕가는 서자도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려시대나 신라시대는 물런 유학의 시대가 아니였기에 말할 가치도 없다. 우리는 족보를 만드는 과정도 여러차례 인쇄소가 불나서 못만든 경우까지 발생할 정도였으니 무슨 여러말들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목적땜에 피본다 샘치더래두 이상한 문중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일명 새치기 수법에 능한 집안이다. 한데 <우리성씨와 족보이야기>책을 보니 17세기 까지도 인구의 40%만 족보를 가지고 있기에 60%는 족보도, 어떤 집안은 성도(姓)없는 집안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조선 초기만해도 <세종 실록 지리지>각 군현 성씨가 약 250개, 45,000개 본관이 오늘날 본관이 3,400개로 줄어 든것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같은 동성끼리 유력 중간 씨조로 갈아타기한것이라고 한다. 자기 밥상이 아니면 먹지를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또 다른 사람은 밥이 준비된줄 알고 있다가 굶기 때문이다. 역사적 근거가 있어도 그것을 쓰지 아니하고 (문무왕비석은 부서버리고 /물런 탁본은 다행이 있지만) 옆에 좋은 어르신집안 것은 새치기하고....우리 경주김씨는 유력 대선 주자도 없는 참 독특한 시대에 있다. 무었이 거리낄것이 있는가? 역사적 기록대로 새족보는 기록하자. 남의 집안은 없는것도 만들어서 욕하고 난장판을 치고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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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씨와 족보이야기 ,박홍갑저, 도서출판 산처럼, 2014년 8월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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