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자 김태헌
작성일 2016-01-04 (월)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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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수목사는 석방되어야합니다
초대 교회의 순교
1. 초대 교회의 시련
B. C. 105년에서 43년까지 실있던 로마 제국의 시세로는 『신들의 본질에 관히- 여』 라는 책에서 “종교란 신들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로미인들은 이
“신들을 바로 섬기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깊은 신잉을 가진 민족으로, 신들의 도움으로 ... 경건, 종교심, 지혜로 인하여 다른 모든 민족들보다 탁월하다”고 띨한
다 또한 B. C. TI년부터 AD. 14년까지 로미를 다스렸던 첫 번째 로마 황제 아우 구스투스(Augustus:아구스도)는 “나는 로p}에서 ... 의회의 동의를 얻어 잃개의
신전들을 다시 복구하였는데, 당시 신전의 보수가 요구되는 경우, 언제고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고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76세 때 회고하였다 이 모두 로마
제국의 종교에 대한 다양성의 인정과 포용 정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면 그러한 로마가 어떻게 기독교를 박해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은 커질 수
밖에 없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AD. 64년 7월 발생한 로마의 대화재를 통해 처음으로 나타난다 당시 박해는 로마 시를 중심으로 지엽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로마에서의 기독교인들의 법적 지위를 보여 주는, 그리고 로마의 기독교 빅해의시작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이교도 역사가 타키투스(A D. 61/
62 -120)의 보고는 광분한 네로에 의한 기독교인들의 환난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적 노력이q, 황세의 선물 공세도 그리고 신들을 향한 제사도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소
문을 가라앉히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더욱 사람들 사이에 커져 가는 확신은, 그 화
재는 최고의 명령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들을 끝내기 위해, 네로는 다른 사
람들을 범인으로 제시하였고, 가장 무거운 벌로써 처벌을 하였다. 범인들이란 그들의 부끄
러운 맹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소위 크리스천이라고 불리는 무리들이었다.
즉, 네로는 로미의 종교 다원적 혼합주의 종교관과는 상반되는 유일신 신앙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인들의 미움을 이용하여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볼았고,
잔인한 처형을 했던 것이다 타키투스는 또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동물 가죽을 뒤집어씌워 개들에게 물려 살점들이 떨어져 나가 죽게 했고? 어떤 이들은 십자
가에 못 박아 죽였으며, 또는 화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어두움이 찾아왔
을 때 밤을 밝히는 조명으로 불사르기도 하였다. … 그들이 공공의 질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유일무이만 한 사람의 살인 쾌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희생당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동정
심을 유발하였다.
이 시런이 교회에 주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제 막 출발하는 교회를 향해
시l싱의 실싱을 적니라하게 보여 주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아니었을까!
2. 순교와 배교
한 장의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2세기 초 기독교인의 박해가 어떠했는지를 파악
할 수 있다 로마 황제 트라얀 시대(Trajan, S3 -117)에 플라니우스(Plynius)가
소아시아 지방의 집정관 (100 -113)으로 파송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처음으로 기
독교인의 문제를 접하게 되어 재판을 해야만 했다. 그때 당시 플라니우스와 황재
토랴얀 사이에 주고받은 두 장의 서신이 오늘닐까지 님아 있어,3세기 중엽까지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 정부의 공식적 입장을 보여 주는 중요한 법적 자료로서
평가되고 있디: 이를 통해 기독교인들의 순교와 배교의 역사도 생생히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편지를 통해서 먼저 확인할 수 있는 바는, 2세기 초 기독교인
들을 대적한 빅해가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으나 원칙과 법규에 의한 것이 아
니라, 지역 통치자의 주관적 관점에서 행해졌던 독단적인 박해였다는 점이다 또
한 당시 횡행하덴 디원주의적 신잉에 동참하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의 유일신 하나
님만을 섬기는 ‘독선적’ 신잉에 대한 거부 반응에서 출발한 감정적 대응의 성격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플러니우스의 말이 이를 잘 반영한다
기독교인들을 향한 재판에 야직 나는 잠여해 본 경힘이 없어, 그들에게 어떠한 벌을 주어야
하고, 어느 정도까지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확신이 없는 것은,
그들을 처벌하는 일에 있어서 나이에 따라 처벌의 강도를 달리해야 하는지, 아니면 노인들
52 제 I 부 초대 교회사
처럼 아주 젊은 사람들도 똑같이 다루어야 하는지, 잘못을 뉘우치는 자들에게는 용서를 해
야 하는지, 기독교인이었다가 이제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닌 자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
는지, 범죄한 사실이 없는데도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 이름과 관련된 죄를
범한 기독교인들을 힘께 처벌을 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입니다
한편 운교의 길을 기꺼이 택했던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도 생생하게 제시된다
한번은 나에게 고발된 기독교인들을 새판하였습니다. 먼저 그들이 기독교인들인지를 물었습
니다. 그렇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두 번, 세 번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위협
과 함께 동일한 질문을 반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굽히지 않았을 때, 사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처럼 신앙의 절개를 지킨 것은 아니었다 박해
로 인한 신앙 변절자의 한없이 긴사하고도 나약한 모습들이 보인다. 그 결과 이
전까지 썰렁했던 많은 신잔들은 다시 참배객으로 북적거렸다.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 앞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던 참담한 배교의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과거에 크리스천이었지만 오래 전 신앙을 그만두었다고 했습니다. 이
미 3년 전, 아니 더 오래 전, 어떤 자들은 벌새 20년 넘게 신앙을 갖지 않고 있다고 하면
서, 신들의 우상 앞에 절했고 그리스도를 모욕했습니다.
플리니우스의 편지에 대한 황제의 짤막한 답신은 로마의 공식 입장을 몇 가지
로 보여 준다. 첫째, 처벌에 있어서 분명한 원칙이 있어야 할 것, 둘째, 기독교인
들은 마땅히 처벌할 것, 셋째, 뉘우치는 자들은 파거가 아무리 의섬스러울지라도
용서를 해 줄 것 등이었다 더욱 체계화될 로마의 박해를 생각할 수 있다 이때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임마누엘의 신앙뿐이었을 것이다
3. 순교자의확신
1,2세기 초대 교회의 대표적 순교자들로 ll5년(7) 로미- 황제 트라얀 통치(93
ll7) 때 순교한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였던 교부 이그나터우스(7-ll57), 1또넌(7)
피우스 황재(138-161) 때 화형당한 서머나 교회의 목회지 폴리겁(697-1557), 그리
고 명상집으로 유맹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형제 시절 165년(7) 순교한 저스틴
(1007-1657)을 꼽는다, 그중에서 폴리캅의 순교가 설교에서 가장 빈번하게 예화로
제시되는데, 과연 얼마나 역사성을 갖는지는 의문이다. 그가 위대한 순교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순교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에 가깝게 묘사되었는지가 문
저14장 초대 교회의 순교 53
제이다. 훗날 순교자 숭배 전통에서 순교 이야기를 보다 실감나게 부풀리지 않았
나 하는 의혹이 있다40) 위에 열거한 세 사람 중에서 그 어느 누구의 순교 연대
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의문에 무게를 가중시킨다. 그
러나 이그나티우스의 순교에 대한 확신은 당시 박해받던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
를 통해 확실히 드라나고 있다 펀지는 안디옥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철장
에 갇혀 로마로 송치되던 길에서 쓴 일곱 개의 서신들 가운데 하나이다 애베소1
필라델피애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기 있고, 또한 앞에 언급한 순교자 폴리캡에
게 보낸 편지가 있다 내용적으로는 당시 교회의 교리와 사상을 보여 주는 역사
적 문서로 평가를 받는다. 이그나티우스 자신의 순교관뿐 아니라,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딘적 가현설을 경고하고 있다. 이울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과
‘불멜의 약’으로서 성찬식에 대한 설명, 감독의 중요성, 노예 제도에 대한 교회의
입장 등이 나타나고 있다41) 이 편지에서 그의 순교관은 보다 확실히 드러난다.
나를 야수의 밥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시오. 나는 하나님의 밀알이 되어,
야수의 억센 이빨로 온 몸이 바스러져 그리스도의 운전한 빵이 되어질 것이요 자라리 야
수들을 설득하여 나의 무덤이 되게 하시고, 나의 신체의 그 어떠한 조각도 남기지 않게 되
, 길 바라오그럴 때 나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이오 이렇게 하여 내가
하나님을 향한 제물이 되어질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그리스도께 간구하여 주시오. 마치 내
가 베드로나 바울처럼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지만, 나는 죄수일 뿐이지요
그들은 자유자이었지만, 나는 이 시간까지 노여|일 뿐이오. 내가 죽음의 고난을 통과하고
나면, 그때서야 비로소 여|수 그리스도의 자유자가 될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게
될 것이오. 묶인 바 된 나는 지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소 용서를 구하옵는 것은, 나는
무엇이 진정한 경건엔지 알고 있소. 이제 나는 제자가 되기를 시작하고 있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이르기 위해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마땅히 추구할 뿐이오.
무엇보다도 죽음이1 대해 조금도 빙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은 자세가 먼저 피
부로 실감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드라는
진정한 신앙 고백으로서의 순교라기보다는, 보다 완전한 구원을 위한 순교를 추
구하고 있지 않은기- 하는 생각도 틀게 한다.42)
40)    폴리카르푸스 『펀지와 순교록~ , 교부문헌총서 12, 하성수 역주 (분도출사,2000).
헬라어를 함께 싣고 있디
41)    한글판으로는 헬리어와 함께 볼 수 있다 이냐시오스~일곱 편지~, 빅미경 역주
(분도출판사,2어0).
42)    물론 이는 당시 교회의 신학의 단변을 보여 주는 순교적 자세리 하겠지만, 일제
의 총갈 앞에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다 죽어 간 20세기 한국의 순교자 고(故)
주기철 목사의 지세와는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순교자 이그나티우스 4 제 l 부 초대 교회사
저14장 초대 교호|의 순교 55
4. “우라도 그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
다 전사함으로 끝이 났다 떼년 갈리에누스가 그 위를 이어 황제가 되면서 박해
의 명령들은 칠회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기독교인들올 해치지 말라는 칙령이 반
포되기까지 했다 이후 평화의 시기는 약 40 년 간 계속되었다. 님은 문제는 그 무
서운 데키우스 박해로 인해 배교를 했던 사람들의 처리 건이었다. 다행허 훌륭한
키프리안의 인격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어 문제 해결에 도움을 입을
수있었다
키프라안은 『배교자들에 관하여』 라는 글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디루었다 너무
쉽게 선앙을 버린 자들에게는 엄한 별이 내려져야 할 것과 아울러 뉘우치는 자들
에게는 일정 기간의 참회 기간을 통하여 다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문제는 어느 정도 수습될 수 있었다 키프라안은 서
벙-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요 신학자며 저술가로서 교회의 많은 존경과 명성을
오랜 기간 누렀는데, 약 2세기 후에 등장한 4세기 어거스틴(Augustine, 잃4-
430)의 출현과 함께 짐잠해 졌다 키프라안은 어거스틴의 사상에도 결정적인 영향
을 주었을 뿐 아니라, 어거스틴 역시 그를 존경하였다.
키-르타고의 감독 (248-짧)을 지냈던 키프리안 (디pnanus, 약1fX)/2(X) ← lB)
이 g년 9월 14일 단두대 위에서 순교를 당할 때, 많은 교인들이 모여들어 “우리
도 그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며 함성을 질렀다 북아프리카 교회의 최초의 순교
자이었던 키프리안은 심문을 당할 때나, 처형을 당할 때에도 평소 인격의 고매함
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겸손했던 키프리안은 글을 꼭 써야만 할 때를 제외하고
는 명성을 위해선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러 개의 결정적인 기독교
교리의 근본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키프리안은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면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실 이
말은 이단에서 받은 세례의 무효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가 248년 카르타고 교회
의 감독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이- 249년 말 시작되는 데키우스(않ius) 황제의 조
직적인 최악의 기독교 박해는 많은 교회를 어려움애 빠져 들게 하였다 모든 백
생들은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것과 이를 이행한 증명서를 소지힐 것을 맹‘
령받았다. 이에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버리고 이빙의 신들 앞에 경배를 드렸
다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 자는 기독교인으로 인정되어 지위를
박탈당하며, 재산을 압류당하고, 감금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감독 키프
리안은 지하로 숨어들어 서선을 통한 목회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순교한 로마 교회의 감독 파피안과는 비교되어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키프리안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해서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피신해 있는 동안 발생
했던 문제들과 평생 동안 싸우면서 전 생애를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노골적
인 배교 행위 외에도 어떤 자들은 실제로 선들 앞에 제사를 드리진 않았지만 뇌
물로 희생 제사를 드렸다는 증명서를 구입하여 박해를 피하기도 했다 어떤 자들
은 희생 제사를 드리지는 않았지만 제물을 사르는 불속에 향을 뿌림으로 예수 그
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안전할 수 있었다 이렇듯 신앙을 지키지 못
하고 타락해 버렸던 자들의 수가 평신도에서 감독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렇다고 데키우스의 빅해가 그 목표를 달성한 것은 이-니었는데, 그
러한 환난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킨 이들의 수는 아주 많아 로마의 관리들은 이
일에 있어서 지치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박해는 251년 데카우스가 고트족과 싸우
의 주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과 뜨거운 고백적 신앙의 절개를 조금이라도 희석시
켜서는 안 될 것이다 56
제5장
로마의 기독교 공인
1. 밀라노 칙령
로마는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의 선음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인 4세기에 접어
들어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다 기독교인 탄압에 앞장섰던 동로마- 제국의 황재 길
레리우스가 311년 임종 시에 관용의 직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박해의
목적들이 달성되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
고 기독교인들은 로마 조상들의 신들에게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다른 신들에게 경
배하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규율을 지킬 뿐이었다 갈레리우스는 자신의 병이, 기
독교인들이 섭기는 신의 저주일 것이라고 생각해, “이제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평
안을 위해 자선들의 신에게 의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공포하면서 기독교인
들의 존재를 현설로 받아들였다. 무엿보다도 황제는 그들이 공공질서를 위배한
사실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2 년 후 313년, 황제 콘스탄틴(Konstantin)은 밀라노 직령을 반포했다 이제까
지 공포되었던 모든 반기독교적 칙령들이 철회됐으며, 기독교인들어내 “아무런 저l
한도 받지 않고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는 지유”가 주어졌다 박해 시절 압류되었던
교회의 재산도 조건 없이 반환됐고 로마의 여타 종교들과 같은 법적 지위를 기독
교에 부여했다. 황제의 분명한 뜻을 일리기 위해 전국 곳곳에 황제의 칙령을 공
고했다 진정 신잉의 자유가 현실로 다가오는 꿈같은 순간들이었다. 교회시-가 유
세비우스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 주님께 새 노래로 찬양하라1 음침하고 어두운
광경과 소식이 지난 뒤에 주님은 우리를 높이셨도다 ... 지난날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났도다”고 당시의 기쁨을 토로히고 있다 한편 ‘태양선을 섭기던 콘스탄틴이
제5장 로마의 기독교 공인 57
어떻게 기독교를 공연하기에 이르렀는개 ’ 하는 점이 또한 궁금하지 않을 수 없
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의해 공인된 배경에는 콘스탄틴이 경험했던 로마의 성
벽 앞 물비안 디리 전투에서의 극적인 승리가 있었다 상대방 군대보다 열세한
병력을 이끌고 있딘 콘스탄틴은 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꿈에서 “이 표시에
의해 승리하리라”는 밀을 들었다. 이에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머리글자를 병사들
의 방패에 그려 넣게 했다. 콘스탄틴은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서로마’ 제국을
장악하게 됐다 이제는 로마의 신들에게 드렸던 관례적 감사제가 생략됐다 그는
교회 예배를 통해 제국의 안녕을 보장할 수 있도록 교회의 복지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간주했다
321년에는 교회가-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볍인 자격을 부여했으며, 태양
선을 숭배하던 일요일이자 기독교의 주일을 주간 휴일로 공포하고 그날에 노동을
금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또한 소송 당사자들이 합의할 경우 소송 건을 주교정으
로 가져길 수 있도록 해, 감독의 판결권을 인정했다 그는 비잔티움을 자신의 이
름을 따리 콘스탄틴노플이라고 하고 기독교 도시를 구현하파 했다 이렇듯 황
재는 제국의 수호신으로 소수파인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을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도 아니었으며, 여전히 이교 신영-은 활기를 띠
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황제의 이러한 종교 정책을 적극 지원하지도 않았다. 이
점은 사실 콘스탄탄에게 있어서 정치적 모험이었다 그래서인지 콘스탄틴은 여전
히 이교적인 대사제의 직책을 그대로 받이들였고 동전에는 태양신을 그려 넣었다 – 새로쓴 세계 교회사 ,주도홍 저, 개혁주의신행협회 출간, 50-57쪽-
아까 cnn tv를 보다가 깜짝 놀라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Tv에 임현수 목사가 북한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데 (인터넷 신문으로 기사를 보니 종신노동교화형) 이건 잘못된 처사인것이다.
물런 북한이 말하는 북한 실정법 위반은 이해 된다. 하지만 북한이 공인된 칠곡교회나 평양의 몇 개의 종교 단체 일부를 문연것이지 전국민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은 아니였기에 교회 입장
에서는 종교 탄압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분은 북한이 굶주려 아사자가 60-70 만명이 날 때 오직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실 그때는 도와주는 사람이 미친놈이었고 필자 역시
미친놈이었다) 도와주었는데 그만 일이 요상하게 되어서 가슴 아프다고 아니할 수가 없다. .  나머지 여러목사도 정신교육후 풀어주길 바란다. 세계에 종교자유를 주지 않는 나라는 현재 세
계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이슬람 나라 외에는 자유가 거의 있다. 종교에 완전 자유가 없는 것이 문제 이지 이분들을 국가보위를 무너트린다고 막 잡아가는 것은 어려울 때 교회의 지원을 그리
원하였다가  이제는 살만하니 나가주란 소리가 아니겠는가? 한가지 덧 붙인다면 이번 기회에 종교의 자유를 대폭 열어 주었으면 한다. 사실 북한이 따르는 중국,, 러시아는 완전 종교의 자유
가 있다고 본다(나의 생각) 하지만 그들은 사회주의 국가이다. 왜 북한은 안된다는 것인가? 물런 북한도 종교는 있는줄안다. 주체사상 …..  하지만 그것을 학문적으로 만든 황장엽은 남한에
망명왔다가 세상을 뜨셨다. 인간이 만든 것은 어느하나 완전한 것이 없다. 그래서 불교든지 기독교든지 자유를 주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의 만든 정치사상이 국민의 행복을 줄수는 없기에 말이다.
그래서 러시아도 공산주의 창설국이지만 지금은 자본주의적  사회주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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