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 약 력

* 1891년10월11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 출생

* 1914-17년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부 졸업, 중앙학교인수, 중앙학교교장

* 1919년 3.1운동 배후 지도에 관여, 경성방직 설립

* 1920-40년 동아일보 창간 2,5대 사장, 중앙고보 교장, 보성전문학교교장

* 1940-45년 동아일보 강제 폐간 이후 농장 경영

* 1945년 8.15이후-연말까지 국민대회 준비회 조직, 동아일보 복간

* 1946년 동아일보 9대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비상국민회의 산업경제위원장, 고려대학교 설립

* 1947년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

* 1948년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과 회담,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 역설

* 1949년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 1951년 제2대 부통령

* 1952년 독재에 항의해 부통령 사임

* 1954년 반독재 민주세력의 통합신당(新黨)창당 지도

* 1955년 2월18일 별세, 국민장엄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시작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어져 가던 남한 해방정국의 좌익적 급류를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방향으로 우선회 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비정치적} 정치지도자가 있었다. 바로 만54세의 仁村 金性洙였다.

 

일제(日帝)치하에서 주로 교육 언론 산업의 세 방면을 통해 민족운동을 이끌었기에 비정치인의 인상이 강했고 스스로도 정치인이 되기를 거부했던 그를 해방정국의 특수상황은 정계의 전면으로 불러냈던 것이다.

 

仁村은 전북 고창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난 때로부터 7년 뒤이며,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891년에 태어났다. 만석꾼 집안의 장손으로 자랐지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東京유학을 단행, 금성(錦城)중학을 거쳐 만23세이던 1914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仁村이 일찍부터 東京유학을 결심했던 까닭은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 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키는 것이 조국의 자주독립에 도움이 되리라는 인식에 도달했던 데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자강론자들의 애국계몽주의적 실력배양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하겠다.

 

실제로 仁村은 귀국 즉시 경영난에 허덕이던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키웠으며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뒷날 보성전문학교도 인수해 역시 일제치하에서 대표적인 민족교육의 도장으로 성장시켰다.

 

한편 민족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정신에서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근대자본주의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民族언론[東亞]창간

 

그렇다고 해서 仁村의 민족주의가 교육과 산업에 국한 되지만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는 파리평화회의에서 윌슨 미국대통령이 약소국국민들의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은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항일운동의 기운이 급격히 확산되는 것을 목격하고 仁村은 죽마고우(竹馬故友)인 古下 宋鎭禹와 함께 東京의 조선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 때 仁村은 중앙학교 교장직을 宋鎭禹에게 맡겨놓은 터여서 두 사람은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을 무대로 일을 추진했다. 이 일로 3.1운동 직후 우선 宋鎭禹가 체포됐다.

 

그러나 {仁村은 투옥을 피해야만 교육사업을 비롯한 더 큰 민족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두 사람만의 원려지계(遠慮之計)에 따라 宋鎭禹가 仁村의 관련을 적극 부인해 결국 宋鎭禹만 1년7개월 남짓 투옥됐다.

 

[더 큰 민족사업]가운데 하나는 동아일보의 창간이었다. 仁村은 만29세이던 1920년 4월 1일 마침내 민족의 대변지로 동아일보를 창간한 것이다. 이 때로부터 동아일보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는 1940년까지 20년 동안 仁村은 宋鎭禹와 손잡고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단군릉 수축(修築), 李舜臣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祠堂)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제정 등 갖가지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국산품애용운동인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의 추진, 농촌계몽운동, 그리고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孫基禎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 등이 그 보기들이다.

 

이러한 저항으로 동아일보는 네 차례나 무기 정간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仁村 스스로 총독부나 총독부 하수인으로부터 협박과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1940년 8월 10일, 일제는 눈에 가시같던 동아일보를 아주 폐간시켰다.

 

仁村은 농장을 경영하면서 사실상 은거의 생활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일제는 그에게 일본 귀족원 의원직과 작위(爵位) 수락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제의 항복발표가 임박했던 1945년 8월 중순의 어느날 仁村은 宋鎭禹의 연락을 받고 은밀히 만났다. {총독부가 치안권을 비롯해 통치권의 상당한 부분을 우리에게 넘기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받으면 괴뢰정권이 될 수밖에 없으니 거절해야겠다}는 취지로 宋鎭禹가 설명했다. 仁村은 물론 전적으로 찬성하면서 {정권은 연합국으로부터 받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하루빨리 환국 하도록 해서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점에서 宋鎭禹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실제로 우리가 이 연재의 제3회에서 이미 보았듯 宋鎭禹는 그 뒤에도 끈질기게 계속된 총독부의 치안권 이양 제의를 거부했다.

 


 

 

▼ [臨政중심 건국]노선 ▼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제는 항복을 발표했다. 바로 이날 呂運亨은 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받아들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세웠다. 곧이어 조선공산당이 재건됐으며 조선공산당의 강력한 영향아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변조됐다. 좌익의 물결이 남한 전체를 집어삼킬 것 같은 형세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내각 구성을 발표하면서 仁村을 인민위원 겸 문교부장으로 임명했다. 그것은 물론 仁村과 같은 명망가의 이름을 빌리고 싶었던 인공(人共)쪽의 일방적 임명이었다. 仁村만이 아니라 李承晩 金九 金奎植 등이 모두 그러한 식으로 이름을 도용당했다. 仁村은 건준(建準)과 인공을 모두 부인하면서 임정봉대론을 폈다.

 

그러나 정계의 일선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교육자요 언론인임을 자처하고 이 방면에서 건국사업의 일역을 맡고자 했다. 그래서 일제 말기에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격하된 보성전문학교를 원상대로 복구시켰고 1946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고려대학교로 새롭게 발전시켰다.

 

또 1945년 12월 1일에는 동아일보를 복간시켰다. 자신은 이렇게 교육과 언론에 정력을 쏟으면서 宋鎭禹가 정계의 일선에서 활약하도록 적극 도왔다. 仁村은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1당 독재주의와 영토팽창주의, 그리고 남한을 휩쓰는 공산좌익의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경계하면서 건강한 보수우익세력이 자리잡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宋鎭禹와 더불어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한민당과 미군정청의 제휴를 성립시키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렇다고 해서 건강한 보수우익세력의 육성이 仁村의 궁극적 정치목표일 수는 없었다.

 

이 시점에서 그가 설정한 당면과제는 임정의 조속한 환국 실현, 그리고 임정 중심의 독립정부 수립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영회, 국민대회 준비회, 환국지사 후원회 등의 조직을 적극 후원했고 특히 李承晩이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키는 일을 힘껏 도왔다. 정계의 일선에 나서기를 사양하던 仁村을 마침내 불러내게 된 일이 일어났다. 평생의 동지이자 한민당 수석총무인 宋鎭禹가 1945년 12월 30일 암살 당한 비극이 바로 그것이다.

 

갑자기 당수를 잃은 한민당은 고사를 거듭하는 仁村을 1946년 1월 7일 수석총무로 추대한 것이다. 이 무렵 남한 정계는 [코리아에 관한 모스크바 의정서]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양분됐다. 그 문서에는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조항이 들어 있었기에, 흔히 전자를 찬탁세력이라 불렀고 후자를 반탁세력이라 불렀다. 仁村은 물론 반탁의 입장에 섰다. 신탁통치는 민족의 지상과제인 독립과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반탁노선을 밟게 되면서 仁村은 반탁의 중심세력인 임정이 소집한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하게 됐는데 李承晩 金九 金奎植 등이 이끈 비상국민회의에서 仁村은 46년 2월 산업경제위원장으로 선출됐다. 安在鴻이 정무위원장, 趙素昻이 외교위원장, 金炳魯가 법제위원장, 그리고 金九의 오른팔이던 嚴恒燮이 선전위원장으로 각각 선출됐다. 비상국민회의는 곧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으로 바뀌는데 의장 李承晩 부의장 金奎植 총리 金九로 구성된 삼두체제 아래 보수우익의 [반탁]세력이 총집결되어, 좌익의 「찬탁」세력이 총집결한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에 맞서고 있었다.

 

그런데 1946년 여름 이후 李承晩 金奎植 金九의 삼두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白凡의 신뢰얻어

 

우선 金奎植은 민전의 呂運亨과 함께 좌우합작을 시도했다. 다른 한편으로 李承晩은 북한의 일원적 공산체제에 맞서기 위해 남한에서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金九는 임정이 미군정을 대신해 집권한 뒤 통일정부를 세우는 길을 밟아야 한다고 제의했다. 우익진영의 3영수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것을 걱정하면서 仁村은 우선 자신이 이끄는 한민당과 金九의 한국독립당의 합당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李承晩을 고문으로 하고 金九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추대를 받았다.

 

金九는 열다섯 아래의 仁村을 믿음직하게 여겨 양당의 합당은 실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양당의 합당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특히 단독정부수립문제를 놓고 양당사이의 거리는 결코 좁혀질 수가 없었다. 仁村은 남한에서 정부를 세우지 않으면 소련과 북한에 의해 공산화되고 만다는 판단아래 李承晩의 건국노선을 적극 뒷받침한 데 반해, 金九는 李承晩노선을 비판하면서 남북협상의 길을 밟았던 것이다. 결국 李承晩과 仁村의 건국노선이 열매를 맺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됐다. 이 과정에서 仁村은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강력히지지했다.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려면 책임정치를 구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의원내각제가 필수적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李承晩은 대통령중심제를 관철시켰고 이 일을 계기로 李承晩은 仁村의 한민당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仁村도 초대 재무장관 입각제의를 거절하면서 李承晩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仁村은 그 뒤 제1 야당의 당수로서 李承晩의 일인독재체제로의 편향을 견제하는 데 힘썼다. 우선 항일투사들인 대한국민당의 申翼熙와 대동청년단의 池靑天을 받아들여 한민당을 민주국민당으로 개편하면서까지 건전한 보수야당을 키우려 했으며 이 민국당을 기반삼아 李承晩의 실정(失政)을 용기있게 비판했다.

 

1951년 5월 仁村은 제2대 국회에서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李承晩의 독주를 막고 민생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노력은 「외로운 싸움」으로 끝나곤 했다. 그래도 그의 끈질긴 주장으로 고관이나 고위장성에게 흔하게 쓰이던 각하의 칭호를 없앨 수 있었다.

 

1952년 여름, 李承晩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당시 헌법 절차에 따라서는 대통령에 재선될 가망성이 거의 없어진 상황에서 李承晩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야당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연행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면서 헌법을 고친 것이다. 仁村은 이 폭거에 항의해 부통령을 사임했다. 그리고는 부산의 국제구락부에서 열리기로 된 반독재민주구국선언대회에 참석해 민주주의 수호만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길이라는 연설을 하려 했다.

 

그러나 정치폭력배들이 회의장에 난입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李承晩은 새 헌법이 마련한 절차에 따라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3선을 위해 1954년 11월 무리하게 헌법을 다시 고쳤다. 李承晩의 계속되는 비민주적 행태는 야당세력의 결집을 가져왔다. 신당 창당운동이 본격화한 것이다. 仁村은 물론 이 운동의 밑거름이자 울타리가 됐다. 그러나 仁村은 1955년 2월 18일 향년 만64세로 별세하고 만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7개월 뒤 범야신당(汎野新黨)으로서의 민주당이 창당됐다. 그리고 제1야당 민주당이 중심이 된 반독재민주화투쟁은 5년 뒤 4·19와 제2공화국 탄생으 로 꽃을 피웠다.

 

이렇게 볼 때 仁村의 일관된 민주주의 정신은 제2공화국에서 펼쳐진 것이라 하겠다.

 


 

▼ 어 록 ▼

 

* [신탁통치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에 배치되는 것이니 반대해야 한다. 독립에 이르는 다리(橋)로서 임시정부의 법통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

(1946년 1월14일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서의 담화)

 

* [오늘날의 상황에서 우리는 유엔에 협력하는 한편 소련을 경계해야 한다. 소련은 독재국가이고 또 민족자결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1948년 4월6일 동아일보에 발표한 「선거와 국민의 자각」)

 

* [우리가 공산주의를 격멸하기 위해서는 여러 우방과의 제휴와 친선을 촉진시키는 한편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확보하여 확고부동한 민주주의를 이 나라에확립해야 한다]

(1951년 5월18일 부통령 취임사)

 

* [현정부는 충언과 직언을 혐오하고 아부만을 환영하며 인사정책은 사적친분으로 일관하고 있다]

(1952년 5월29일 부통령 사임서)

 

* [모든 사람의 존엄과 자유 인권을 헌법으로 보장하고 이 헌법에 입각해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를 실현하여 우리와 우리들의 후손만대에 평화롭고 번영된 생활을 이룩하려는 것이 우리의 지상 목적이요 사명이다]

(1952년 6월20일부산 국제구락부 반독재호헌구국선언대회 식사)

 

* [재야세력을 망라한 신당의 조직은 국민의 여망이다. 우리 민주국민당으로서도 구각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자세를 갖춰야 할 때다]

(1954년 12월 민주국민당 간부들에게 당을 해체하고서라도 재야 민주세력과 손을 잡고 신당 조직에 앞장설 것을당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