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로(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     

 

호 가인(街人). 전라북도 순창(淳昌)에서 출생. 초대 대법원장

 

15대 할아버지는 호남의 거유(巨儒) 하서(河西) 김인후요, 아버지 상희(相熙)씨는 사간원의 정언(正言)을 지냈다. 어머니 고씨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예.

 

18세 때 담양(潭陽)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서양인 선교사에게 산술과 서양사를 배웠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용추사(龍湫寺)에서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을 듣고 동지들을 모아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다.

 

당시 성리학의 대가였던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수학하였고, 16세 되던 1904년 개항지 목포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고향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세워 신문학을 공부했다. 같은 해 창흥학교(昌興學校)를 설립,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1910년에 도일(渡日), 1913년에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였고 일본 유학 중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다.

 

경성법전(京城法專) 조교수와 보성전문(普成專門) 강사를 역임, 19년에 변호사를 개업하였고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 6·10만세운동, 원산파업사건(元山罷業事件), 단천노조사건(端川勞組事件) 등 관련자들의 무료 변론을 맡았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8·15광복 후 한민당(韓民黨) 창설에 참여, 중앙감찰위원장이 되고 1948년에 초대 대법원장(大法院長)에 취임하였다. 1957년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자유법조단(自由法曹團)의 대표,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 국민의 당 대표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는 우리나라 사법의 화신이요 법조계의 큰 스승(師表)과 같은 존재다. 청빈과 강직, 의연한 자세로 우리나라 사법부의 기틀을 다졌으며 또한 단연 존경받는 법조인으로 꼽힌다.

 

가인이 1953년 10월 제1회 법관훈련 회동에서 당부한 「법관의 몸가짐론」은 지금도 법조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금과옥조로 회자된다.

 

그것은 첫째 세상사람으로 부터 의심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 둘째 음주를 근신해야 되겠다는 것, 셋째 마작과 화투등 유희에 빠져서는 안되겠다는 것, 넷째 어떠한 사건이든지 판단을 하기 전에 법정 내외를 막론하고 표시해서는 안되겠다는 것, 다섯째 법률지식을 향상시키고 인격수양을 해야 하겠다는 것 등등이다.

 

이같이 그는 법관의 올바른 몸가짐이야말로 사법부 독립의 결정적 요소로 생각했다. 그의 올곧은 자세야말로 이승만 정권의 갖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사법부 독립과 권위를 지켜낸 원동력이었다.

 

며느리의 부탁을 받고 손자의 중학교 입시결과를 알아 보러 학교에 갔던 가인의 비서관이 혼났던 일화는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그의 추상같은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법대 최종고 교수의 표현대로 「이 나라 사법의 틀과 뼈대를 세워 놓은 터주요 어른」이었던 가인은 1888년 1월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태어났다. 여섯살 나던해 할아버지가,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그래서 8살이던 1896년 집안의 기둥이던 할머니 박(朴)씨가 가인을 위해 독서당을 세워 한문공부를 시켰다. 이어 1899년 네살 위인 연일(延日) 정(鄭)씨를 신부로 맞았으나 이듬해 할머니마저 세상을 뜨고 12살 나이에 집안의 가장노릇을 해야했다.

 

가인은 1902년부터 2년여 동안 당시 성리학의 대가였던 간재 전우(田遇)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며 16세 되던 1904년 개화지 목포로 옮겨 일신(日新)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분개하여 자살할 것을 생각했으나 그만두고 귀향, 순창에서 최익현(崔益鉉)의 의병에 가담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의병활동을 벌였다.

 

1909년 이웃 전남 담양군 창평으로 집을 옮긴후 고정주(인촌 김성수의 장인)가 세운 창흥의숙(昌興義塾)에서 속성과 6개월을 마치고 22세 되던 1910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대학 법과 청강생으로 등록했으나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잠시 귀국했다 191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明治)대학 법과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1915년 일본대학 및 명치대학 (명치대학과 중앙대학 대학원 과정까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교수로 부터 일본변호사 시험 권유를 받았으나 조선인은 응시자격이 없어 포기하고 만다. 이 해에 귀국, 경성전수학교(서울 법대 전신) 조교수로 발령을 받고 보성법률상업학교(고려대 법대 전신)에도 출강한다. 하지만 변호사 자격 취득을 위해 1년 동안 부산지법 밀양지원 판사를 거쳐 32세되던 1920년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이때부터 대동단사건을 비롯 김상옥사건, 조선공산당사건, 6·10만세, 옥구군 소작쟁의, 원산노동자 파업등 1백여건 이상의 변론을 맡아 「민족변호사」또는 「사상변호사」로서 열변을 토하였다.

 

특히 백두산 인근 2백여 호를 집단학살 한 펑펑 고을 화전민사건은 생명의 위협을 무릎 쓰고 현지에 내려가 일본의 만행을 파헤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대구학생비밀결사, 광주학생사건, 단천농민학살, 간도공산당 사건과 안창호 변론 등에 나서게 된다.

 

이 같은 변론과 함께 1924년에는 조선변호사협회 이사장, 19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등으로 선출되어 국내 항일민족운동의 중심 축을 이룬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가인의 활동에 제동을 걸기 위해 6개월 동안 변호사 정직처분을 내리고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자 1934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가족을 데리고 은거, 농사를 지으며 수절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해방이 되자 가인은 송진우·백관수 등과 함께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는 한편 여운형 등 건준 세력과의 좌우합작운동을 펼쳤다. 이어 미군정 및 남조선과도 정부의 사법부장 자리를 맡았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 9년 4개월 동안 우리나라 사법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재임 중 가인은 법전편찬사업을 주도하고 법원의 체계를 세우는데 심혈을 쏟았다. 판결을 둘러싸고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면서도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 나갔다. 이처럼 청빈하고 지조가 높았던 가인도 퇴임 후 정치에 투신하면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고 4·19혁명의 불길 속에서 자유법조단을 결성, 뛰어든 1960년 7·29 선거에 고향 순창에서 민주당의 홍영기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던 것이다. 게다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정치를 군인에 맡길 수 없다하여 민정당(民政黨)을 창당 하는등 야당 단일화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병석에 눕게 된 가인은 1964년 1월 76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수유리에 유택을 모셨다.

 

자료 : 전북일보 『20C 전북50인』  


 

 

▶ 주 요 경 력

* 1888년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출생

* 1902년 간재 전우 문하에서 성리학 배움

* 1906년 순창에서 최익현의 의병에 가담함

* 1910년 일본대학 전문부 등록

* 1915년 일본대학 및 명치대학 법과졸업, 명치대학과 중앙대학 고등연구과 수료, 경성전수학교 조교수

* 1919년 부산지법 밀양지원 판사

* 1920년 변호사 자격 얻음, 항일사건 1백여건 변론

* 1924년 조선변호사협 이사장

* 19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 1946년 미군정 사법부장 취임

* 1948년 초대 대법원장 취임

* 1957년 대법원장 정년퇴임

* 1963년 민정당, 국민의 당 대표최고위원

* 1964년 76세로 별세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金炳魯선생 흉상 제막식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 신청사에서 거행됐다. 「항일투사로서, 법의 실천자로서, 자유의 수호자로서」 청렴 강직한 삶으로 일관했던 가인의 고결한 인품을 새삼 되돌아보게 만드는 뜻깊은 행사였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공인(公人)은 무엇을 할 것인가도 문제이지만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인가를 가릴 줄 알아야 한다는 가인의 가르침이 되살아난다

 

가인은 법관의 자격으로 세가지 조건을 들었다.

첫째, 법관은 국민의 생명과 신체, 재산과 명예를 지키는 일을 수행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인격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 법을 공정하게 해석하고 집행하여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깊은 연구와 단련을 계속해야 한다.

셋째, 법관에게 가해지는 직접 간접의 강제나 압력, 또는 정실에 기울지 않는 엄정한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

 

가인이 무엇보다도 경계한 것은 공인의 부패였다.

가인은 국록을 받는 사람은 돈을 탐내서는 안되며 법에 종사하는 사람은 부정을 범하기보다 굶어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말년까지도 신문지를 손바닥 크기보다 작게 잘라서 화장지로 썼고, 담배 한개비도 반드시 두 토막으로 잘라서 피웠다.

기름난방시설이 돼 있는 대법원장 관사에서도 톱밥이나 연탄난로를 사용하고 점심은 국수로 때우기 일쑤였다.

돈의 유혹이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생활이었다

 

정부수립 후 친일파 처단문제에 부닥쳤을 때 가인은 말했다고 한다.

『기녀(妓女)라도 늙어서 남편을 따르면 분냄새가 부끄럽지 않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뒤에 정조를 잃으면 고절(孤節)이 아랑곳 없으리라』누구도 부끄럼 없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았노라고 말하기 어려운 세상, 부패와 변신이 난마처럼 얽힌 어지러운 세상, 가인의 고고했던 한평생이 더욱 우러러 보인다.

 

가인 김병로 평전

"가인 김병로 평전"은 일제 치하시절에 민족주의적 변호사로서, 미 군정기에는 오늘날의 법무장관격인 사법부장으로서, 대한민국 건국 당시에는 초대 대법원장으로 활동하며서 사법부의 기초를 닦았던 가인 김병로에 대한 평전이다.

 

그의 굵직 굵직한 이력을 보더라도 그를 분명 법률가라 말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가인의 삶을 우리나라 민족주의 우파 세력과 연관시켜 살피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가인 김병로는 우리나라 민족주의 운동과 깊이 관련된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말의 항일의병 투쟁과 일제치하에서의 우리 겨레의 민족주의 운동, 해방 직후로부터 1960년대 중반 때까지의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운동을 살필 때마다 그의 이름이 자주,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단순한 법조계의 지도자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게 있는 국민적 정치 지도자 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모닝365 제공]  


 

 

▶ 목 차  

 

책머리에

제1장 국권을 잃어가던 시기의 의병 투쟁 참여

제1절 가인의 태어남과 집안 내력

제2절 한문 공부를 시작하다

제3절 시대의 변천과 새 학문 접촉

제4절 항일 의병 투쟁에의 참여

제5절 실력 배양 운동과 창흥학교 시절

제2장 망국에 따른 일본 유학과 법률 전공

제1절 첫번째 도쿄 유학

제2절 법률을 전공하게 된 배경

제3절 경술국치로 학업을 중단하다

제4절 두번째 도쿄 유학

제5절 유학생 학우회에서의 활동

제3장 법학 교수로서의 출발과 변호사로의 전환

제1절 경성전수학교 교수 시절

제2절 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제3절 독립 투자 변호에 주력하다

제4절 변호사로서의 언론 및 교육 활동

제4장 신간회 참여와 「민족 변호사」로서 독립 운동의 일선에 나서다

제1절 민족 통일 전선 결성이 요청되다

제2절 신간회의 창립과 가인

제3절 법정 투쟁을 통한 항일 활동의 계속

제5장 신간회 제2기의 항일 투쟁

제1절 신간회 간부 취임

제2절 갑산 사건과 가인

제3절 광주 학생 민족 운동과 가인

제4절 민중 대회의 추진과 가인

제6장 신간회 제3기의 항일 투쟁

제1절 중앙 집행위원장직을 대행하다

제2절 독립 운동가들의 변호를 계속하다

제3절 가인의 중앙 집행위원장 취임

제4절 신간회의 해소

제5절 신간회에 대한 평가를 통해 본 가인

제7장 신간회 해소 이후의 가인

제1절 법정 투쟁과 사회 운동을 계속하다

제2절 보성전문을 일으키는 일을 돕다

제3절 「수절」의 세월

제8장 해방의 격동기에 좌우 합작을 추진하다

제1절 해방 정국의 일선에 나서다

제2절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다

제3절 좌우 합작 운동에 착수하다

제4절 한민당을 탈당하다

제5절 민중 동맹과 민족 자주 연맹에 참여하다

제9장 미 군정-남조선 과도 정부의 사법부장

제1절 사법부장 취임

제2절 조선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의 고비를 넘기다

제3절 법전 기초에 착수하다

제4절 헌법 기초에 참여하다

제5절 민족 지도자들을 가리는 운동

제10장 제1공화정 대법원장의 초기

제1절 대법원장 취임으로 사법부의 기초를 닦다

제2절 법률 체계를 갖춰 나가다

제3절 반민특위 재판장으로 민족 정기 수호에 힘쓰다

제4절 이 대통령의 퇴임 종용을 거부하다

제11장 전쟁의 상혼 속에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다

제1절 피난길의 대법원장

제2절 결원된 법관과 부역자 처리

제3절 제2차 부산 피난 시절

제4절 환도와 사법부 운영의 정상

제5절 법원의 기강 확립을 위한 노력

제6절 이 대통령과의 점증하는 갈등

제7절 영예로운 정년 퇴임

제12장 4·19의 격랑 속에서 정치에 복귀하다

제1절 사법부에 가중되는 행정부의 압력과 가인

제2절 자유당 말기 반민주 행태를 공격하다

제3절 민주당 지원 속에 4·19를 맞다

제4절 7·29 총선 출마와 낙선

제5절 제2공화정의 초연한 원로

제13장 민정의 길을 닦기 위한 노력

제1절 5·16과 민정 복귀의 문제

제2절 민정당 창당의 주역으로

제3절 국민의당 창당에 참여하다

제4절 큰 별이 지다

맺는 생각들

 

지은이 소개 : 김학준

1943년 중국 심양에서 출생해 1945년부터 인천에서 성장했다.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은 뒤 서울대 교수, 12대 국회의원,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 단국대 이사장, 인천대 총장,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 총연합회 회장, 한국국가기록연구원 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미국 버클리 대학 객원연구원, 일본 도쿄 대학 객원교수, 독일 뮌헨 대학 객원연구원, 미국 우드로윌슨 국제연구원 객원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동아일보사 사장 겸 발행인이다.

「한국정치론」 등 다수의 저서 및 역서가 있다.

 


 

 

▶ '민족 변호사' 한길서 左右 다른 길로..

 

"민족 변호사" 한길서 左右 다른 길로... 허헌-김병로 평전 나란히 출간

 

일제 강점기 "민족 변호사"로 치열하게 활동하다가 해방 후 좌우 대립 속에서 남과 북으로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긍인(兢人) 허헌(許憲 : 1885~1951)과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 1888~1964)가 이들이다.

 

이들의 삶을 다룬 평전 "민족 변호사 허헌" (지혜네 발행)과 "가인 김병로 평전" (민음사 발행)이 동시에 각각 출간됐다.

 

해방 후의 격동기에 허헌은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다 월북 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초대 의장을 맡았고, 한국민주당에서 활동했던 김병로는 남한에서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북 입법부, 남 사법부의 최고 책임자로 대립된 말년을 보냈지만 이들은 일본 메이지(明治)대 선후배로 일제 강점기 항일 무료 변론 투쟁을 이끌었던 절친한 동지였다.

 

이들은 이인 등과 함께 "형사공동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신생활 필화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 "보합당 사건" 등 숱한 독립운동 사건의 변론을 도맡았고, 1927년 좌우 합작으로 탄생한 전민족적 항일단체인 "신간회" 활동도 주도했다.

 

긍인과 가인은 이인과 함께 "3인 민족변호사"로 불리며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해방전후의 좌우대립으로 삶이 갈라졌다.

 

[한국일보 송용창기자 2001.03.26]